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통일장 이론]] ==== 아인슈타인에게는 꿈으로 남은 이론. 용어의 정의를 분명히 하자면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고전적 전자기학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양자역학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전 물리학이다. 통일장 이론의 기본적인 사상은 독립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유서깊은 사고 방식에서 나오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맥스웰의 전자기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인슈타인의 관심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전자기력에 의해 시공간의 곡률이 결정되며, 시공간 곡률에 의해 전자기력이 결정되므로 기하학적으로 두 힘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이란 대강의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시도는 생각보다 많았는데, 힐베르트의 이른 시도(1915)를 비롯해서 바일(Weyl, 1919 - 게이지 이론 도입), 칼루차(Kaluza, 5차원 이론), 에딩턴(Eddington, 1923 - 아핀 기하학) 등의 시도를 이어 아인슈타인은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에딩턴의 방법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기본적인 접근법은 아핀 접속의 일반화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계량 텐서가 자동으로 평행이동되는 레비치비타 접속(Levi-Civita connection)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 조건을 무시하면 접속의 대칭성이 깨지면서 시공간에 열률(비틀림, Torsion)을 도입할 수 있다. || [math(T^{\alpha}_{\mu\nu} = \Gamma^{\alpha}_{\mu\nu} - \Gamma^{\alpha}_{\nu\mu})] || 아인슈타인은 이 과정에서 팔라티니 방법(Palatini Method)[* 힐베르트처럼 계량만으로 변분하는 게 아니라, 계량과 접속을 분리하여 변분하는 방법. 일반 상대성 이론의 양대 변분법 중 하나이다.]을 고안하는 등 수학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수학자 아틸리오 팔라티니(Attilio Palatini, 1889~1949)가 사용했다고 알려져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나, 현재 쓰이는 형태는 대체적으로 아인슈타인이 1925년에 발견했다고 지적되었다.[* M. FERRARIS and M. FRANCAVIGLIA "Variational Formulation of General Relativity from 1915 to 1925 "Palatini's Method" Discovered by Einstein in 1925", ''General Relativity and Gravitation'',''' VoL 14, No. 3''' (1982) [[https://citeseerx.ist.psu.edu/document?repid=rep1&type=pdf&doi=c0058fdbbdc4e684668f930db8bbcd901d516cdd|#]]]) 아인슈타인이 1929년 1월 30일 발표한 논문'''[1]'''은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고무적이었고 외부에서 특히 큰 주목을 받았으나 이내 근사적으로만 맞는 등 오류가 발견되었고[* G.C. McVittie, On Einsteins Unified Field Theory i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124, No. 794 (June 4 1929): 366-374], 아인슈타인은 학설을 포기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후 말년까지 통일장 이론에 몰두했는데, 이 경향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양자 역학이 탈바꿈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행동은 한편으로 양자 역학의 비직관적인 요소들을 고전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것이란 기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후 발견된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성공적일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은 말년 커리어의 승부수였지만, 그의 시도들은 끝내 실패적이었고, 대부분 동료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어떤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왔다가 통일장 이론에 관련해 아인슈타인이 써놓은 수식들을 보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대(大)학자 아인슈타인 앞에서 차마 이걸 엉터리라고 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나도 명색이 물리학자인데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걸 멀쩡하다고 할 수도 없고..."라며 고민하다가 그냥 도망나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자들은 통일장 이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때문에 다른 물리학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고립은 심화되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거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에 상주하면서 [[쿠르트 괴델]] 등 소수 동료와 밀접하게 친분을 이어갔다. 그는 73세가 된 52년에 자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매주 화요일에 하는 무도회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자연계의 기본 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인 와인버그와 살람의 [[표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1]''' A.Einstein, "Zur Einheitlichen Feldtheorie", ''Sitzungsberichte der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29) : 2-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